(시편 102:12-28, 시온의 곤고한 날에)

이 시의 앞부분(어제 본문)은 “나의 괴로운 날에” 탄식하는 내용이었다.
오늘 말씀인 후반부는 “시온”의 회복에 관한 말씀이다.

지금 시인은 폐허가 된 시온 앞에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심정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아마도 시인은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바벨론에 끌려갔다가 막상 돌아왔을 때 이 모습을 직면한 것 같다.
이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앞으로 이루어질 회복을 노래한다.

지금 시인이 보고 있는 예루살렘의 상황은 폐허 자체이다.
성전의 돌들이 무너졌고 그 위에 티끌만 날고 있다.
바벨론에서 돌아왔지만 예루살렘은 영광스럽기는커녕 폐허 속에 내팽겨져 있다.
그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티끌과 돌무더기뿐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폐허 속에서 회복을 본다.
그는 무너진 성전건축의 돌들을 성도들이 “즐거워”할 날을 보며,
그 “티끌도 은혜를 받”게 될 날을 내다본다.
파괴와 폐허는 기정사실이요 현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새로운 미래를 본다.
그는 빈궁하기 그지없는 예루살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돌아보시며 멸시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파괴된 모습들에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티끌은 세상에서 가장 덧없고, 아무 힘이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은혜”를 받은 티끌은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에서 그 도구가 될 것이다.
티끌은 파괴의 결과로 끝나지 않고 모아지고 뭉쳐져서 하나의 새로운 건축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것이 은혜를 입은 티끌이다!

이러한 희망은 과연 근거가 있는가?
세상은 근거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한다.
절망보다 희망이 낫지 않느냐고 한다.
실제로 변화되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희망이 가치 있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확신은 성경과 무관하다.
희망은 좋은 것이므로 좋은 게 좋다, 이렇게 세상은 말한다.
그러다가 정작 죄의 심각한 결과로 유다가 멸망을 당할 때도
하나님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제외한 거짓 선지자들은 끝까지 희망을 노래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 타령은 결국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진실은 무엇인가?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역사다.
그것만이 진실이요 진리다.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시인은 폐허 속에서 회복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이 된다.
단지 희망만으로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단지 희망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희망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그것은 가치가 있고 역사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지금이 희망할 때인지 절망할 때인지를 분간한다.
지금이 하나님의 진노로 절망할 때인지,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회복을 현실로 믿고 희망할 때인지
성도는 지혜롭게 구분한다.
그러나 대체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절망해야 할 때 희망에 도취되고,
희망해야 할 때 낙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이것이 성도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