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2:1-11, 괴로운 날에)

이 시는 참으로 처참하다.
시인은 “괴로운” 날을 만나 너무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괴로움으로 몸이 얼마나 쇠하였는지
“살이 뼈에 붙었”는데 그 “뼈가 숯같이 탔”고, “마음이 풀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다.
“음식 먹기도 잊었”으며 탄식만 할 뿐이다.
그가 먹는 것이란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그가 마시는 것은 “눈물 섞인 물”이다.

이 괴로움의 진원지는 “원수들”의 “비방”이다.
그들이 “종일”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고 있다.
그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다.
그는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밤을 새우”고 있다.
아, 나는 이런 고통에 처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분명 이 세상에 이렇게 극악한 괴로움을 당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자들이 있다.
나는 부모님을 잘 만나고, 시대를 잘 만나서 세상의 험악함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잘만 살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감사한 이유가 되지만 결코 태만하거나 방자할 빙거가 되지 못한다.
나는 오로지 겸손해야 할 뿐이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앞에 나는 나의 편안함이 그들의 고통 덕분은 아닌가 생각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악한 일들은 희생자를 찾기 마련인데
내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먼저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시인은 아마도 무고하게 원수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원수는 시인의 어떤 악함 때문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정당한 비판을 행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미칠 듯이 날뛰는” 모습을 보면 누가 희생자며 누가 가해자인지 분명해진다.
그런데 시인은 그 무고한 고통 속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지만
그 상황이 신속하게 바뀌고 있지는 않다.
그의 고통은 계속 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 고통은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아, 이것은 무엇인가?
“주의 분노와 진노”란 하나님께서 그 원수처럼 “미칠 듯이 날뛰”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미칠 듯이 날뛰는” 것은 그 자신이 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아니라 마귀의 광분이다.

아마도 상당히 오랫동안 간구했는데도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하자
시인은 결국 그것이 “주의 분노와 진노”인 것으로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미칠 듯이 날뛰”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원수가 그렇게 행하는 데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 이유가 내게 있다는 시인이다.
즉 내게 죄가 있다는 처절한 고백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에는 죄가 가장 밑바닥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죄가 나를 태만하게 했고, 죄로 인해 내가 방자하게 굴었다.
죄 된 생각 때문에 앞뒤를 충분히 생각지 못했고 결국 실수를 했다.
나의 죄가 원수의 비방과 광분을 자극했다.
이 모든 일에 나의 죄가 작용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신다.
내가 죄를 다스리지 못한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
가인이 그러지 않았는가!

그러나 “주의 분노와 진노”임을 아는 순간 회복은 시작된다.
원수의 비방과 광분 앞에서는 지지 않으려고 대항을 하는 통에 나의 죄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지 않고 한 발 물러나 생각을 하면 그 바탕에 나의 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주의 분노와 진노”를 살 짓을 했다!
이 순간 원수는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 도구다.
나는 원수의 말이라도 잘 듣고 내가 잘못한 죄가 무엇인지 샅샅이 파헤쳐야 한다.
만일 원수가 나를 선하게 대우했다면 나는 ‘주의 분노와 진노’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괴로운 날에” 성도는 원수의 비방과 미칠 듯이 날뛰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에 맞서 이기려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할 것이요, 나의 죄를 헤아릴 것이다.
지은 죄는 마귀가 농락할 아주 좋은 도구가 되지만
가난한 마음으로 밑바닥까지 낮아져서 회개하는 기도는 마귀가 대적할 수 없다.
“괴로운 날”이면 회개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