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10-3:1, 형제가 되심)

어제 말씀과 같이 히브리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곧 우리의 “구원의 창시자”시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도록 누구에게 하청을 주거나 부탁을 하거나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그가 곧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는 만물의 창조주시며 또한 구원의 창시자다.
곧 그는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인간의 죄로 인해 왜곡되고 변질된 만물을 재창조, 아니 새롭게 창조하신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다.
그런데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변질되었다.
아예 원수관계로 된 것이다.
만물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아는데 인간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계시함으로써만 알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원수 된 죄인을 예수께서 “형제라 부르”셨다!
아, 그가 우리 죄인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

나는 실제로는 부끄러운 일을 굉장히 많이 하면서 뻔뻔스럽게도 부끄러움에 얼마나 민감한가!
즉 나는 이미 창피스러운 일을 다 저질러 놨으면서도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바동대는가!
그것은 내가 부끄러울 일이 없는 것처럼 위장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나는 솔직하지 않다.
나는 상당히 많이 가리고 숨기고 위장한다.
아, 바리새인과 똑같이 외식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 나의 맨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부끄러울 상황을 내가 감당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위장술에 아주 능하다.

그리하여 나는 겉으로 볼 때 부끄러워 보이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과만 상대하므로 고상한 척 한다.
아, 만일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그랬다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예수께 가까이 가서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예수께서 부끄러운 일을 당할까봐 내게 가까이 오지 않으셨다면 나는 영영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내게 어떻게 오셨는가?
냉엄한 심판관으로?
빚을 다 갚으라고 독촉하는 채권자로?
회초리를 든 깐깐한 교사로?
아니다.
그가 내게 “형제”로 오셨다!
그가 나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내가 그의 형제가 되다니!

심지어 그가 나와 같은 자가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가 이 땅에 오신 것, 이 세상의 사람으로 오신 것,
즉 사람의 몸으로 오신(성육신하신) 것,
그것은 그가 나와 같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그가 고난도 당하시고 시험도 받으셨다.
즉 그는 내게 형제처럼 더럽고 부끄러운 나의 모습으로 오시고는,
나를 거룩하신 그와 같은 형제로 부르신 것이다.
그가 나와 형제가 되시고, 그가 나를 형제로 부르셨다!
그가 나를 구원하러 오셔서 나를 구원하신 것이다!
아, 그는 나를 창조하셨고 구원하셨고 다시 새롭게 창조하셨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나는 그로 말미암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위하는 자다!
오늘과 내일의 성탄절 예배에 이 예수를 내가 예배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