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5-11, 자기를 낮추시고)

성탄절 사흘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오늘날은 축제로 즐기지만 그 날은 사실 매우 비천한 날이었다.
예수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욱 구체적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예수의 오심은 아기로 태어나는 순간─오늘날의 성탄절 절기─뿐 아니라
예수의 이 땅에서의 생애 전체를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의미 모두에서, 즉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예수는 비천하게 낮아지셨다.
이것이 성육신(成肉身: 사람의 몸으로 되심)의 의미다.

예수는 낮아지러 오셨다.
그것은 높으신 자가 낮아지셨다는 의미다.
낮은 자가 낮은 것은 낮아진 것이 아니다.
징역형에 해당하는 자가 교도소에 구금되는 것은 낮아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겸손함이 아니다.
그것은 법적으로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 되셨다.
그리하여 죄인 취급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것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만일 아무도 살리지 못할 것이면서, 또는 살릴 일이 없으면서 기차에 뛰어들어 죽어버린 자가 있다면
그의 죽음은 자기 목숨을 끊은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
그는 아무도 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과 생애와 죽음은 죄수를 위해 대신 감옥을 사는 행위요,
사형수를 위해 대신 죽은 행위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죄수들을 석방시키고 사형수를 살린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수는 영영 감옥에 갇혀 있고 사형수는 결국 죽게 된다.
예수의 낮아짐은 낭만적이며 감상적인 과시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행한 절박한 행동이다.

만일 영웅적인 희생을 한 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기린다.
그의 생가를 복원하고 그의 동상과 박물관을 만들고 특정한 날을 제정하고
그의 이름으로 상을 수여한다.
그것은 멋진 보답행위 같지만 사실 죽은 그가 그것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자는 땅속에 있고 산 자들이 그를 기리는 것뿐이다.
예수의 죽음도 그러한가?

아니다.
예수께서 낮아지셨다 할 때, 그는 이제 더 이상 산 자가 아니고 후대의 사람들이 나서서 그를 기리는 것 속에서만 기념되는 문화적 행사의 대상이 아니다.
사람이, 문화가 그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그는 그 스스로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세상을 다스린다!
그는 그를 기억하는 자들의 추억 속에 잔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산 자로서 역사를 주관한다!
인간의 예배와 기념에 관계없이 그 스스로 하나님의 행위를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다!

예수는 “종”으로 오시지만 그는 스가랴가 확증한 바 ‘겸손한 왕’이다!
그는 종으로 섬김으로써 왕으로 통치한다.

예수의 낮아짐은 곧 겸손이다.
그는 높으신 분인데 낮아지셨다.
그는 하나님이신데 사람으로 오셨고 왕이신데 종이 되셨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나를 낮추기는커녕 대체로 나 자신보다 높게 보이려 애를 쓰지 않는가?
내가 나를 낮추는 것이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낮춘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다.
나는 원래 낮은 자로서 낮을 뿐이다.
나는 나를 낮춘 것이 아니다.
내게는 겸손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나를 어떻게든 높게 보이려 하니 나는 얼마나 교만한 것인가!

또는 이보다 더욱 확실하게 나를 진단할 내용이 있다.
내가 과연 사람들을 얼마나 높이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자신을 종으로 여기시고 마치 그가 대신 위해서 죽은 죄인들이 왕이나 되는 것처럼 섬기셨다.
예수는 빌라도의 권위, 대제사장의 위치를 그대로 수용하셨다.
그 불의한 법정을 하늘의 군대로 뒤엎지 않으셨다.
마치 그 법정이 정의롭기나 한 듯 그냥 가만히 당하셨다.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을 나보다 높이는가?
기꺼이, 진정으로?
나는 과연 예수의 낮아지심을 배우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