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11-18, 오셔서 평안을 전하셨으니)

한 달 반 전에 묵상했던 말씀이다.
이제는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우리 주의 강생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에 이 말씀을 다시 대한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거듭 강조된 약속은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한 아기가 우리를 구하러 오시는 메시아의 징표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아기가 와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보여준다.
그는 곧 우리 죄를 대신 십자가에서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 모든 사실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 단어 하나는
바로 “오셔서”라는 낱말이다.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한 아기로 오실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싹과 순처럼 자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때에 우리 죄를 대속하는 구원의 사역을 감당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의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는 곧 그가 ‘오신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오지 않으면 이 약속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다.
아무리 멋진 약속이어서 소망은 계속 심어주어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오지 않고는 그의 뜻이 나타날 수 없다.
그가 오셔야만 이 일이 이루어진다.

이사야도 스가랴도 오실 아기, 오실 왕을 전했다.
그런데 드디어 그가 오셨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왔다.
겸손한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우리에게 오셨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주셨다!

그가 오시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밖에 있었다.
“그때에 너희는(나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
아, 내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의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내가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그와 가까워졌는가?
그가 오셨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로 가지 못했다.
갈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줄도 몰랐다.
나는 구원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나는 죄인으로서 아무 문제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잘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나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므로 내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오셨다.
그리고 그가 나를 그의 안으로 데려가셨다.
그리하여 내가 그의 안에 있게 되었고 그와 가까워졌다.
그러자 나는 내가 지금까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도 원수로 사는 삶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화평하게 살도록 창조하셨는데
나는 하나님 없이, 사람의 필요도 모른 채 나만의 이익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불화와 반목과 전쟁 상태인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화평이신 그가 오시고서야 화평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오셔서” 일어난 일이다!

그가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나)에게 평안을 전하”셨다.
그가 나와 평안하기 위해 내게로 오셨다.
내가 그를 떠났고 내가 왕인 것처럼 살았는데 그 왕께서 내게 오셨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되시고 나를 다스리심으로 내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가 회복되었다.
나의 구원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사실이다.
나는 이제 먼 데 있는 자가 아니라 그와 가까워진 자다.
그와 화평하며 그와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내가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야 함을 뜻한다.
내가 그들에게 갈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신다!
내게도 예수께서 그렇게 오셨다.
내게 먼저 온 자들이 있었다.
나의 부모가 그러하였고 나의 주일학교 교사들이 그러했다.
어떤 사람은 집 밖의 사람들을 통해 전해 듣고 예수의 오심을 만났다.
이제는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
내가 그들에게 감으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시게 해야 한다.
내가 평안을 전해야 그들이 예수께로부터 그 평안을 들을 수 있다.
이 대림절, 이 성탄의 계절에 나는 전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먼 데 있는” 자에게 “평안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