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4:1-11, 요나의 성난 기도)

요나의 성난 기도!
허, 이럴 수가! 하고 반응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드물지 않은 일이다.
요나는 바다 속에서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살아나서 ─그것은 부활이었다─ 거듭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니느웨에 가서 40일 뒤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것이다.

그러나 그 강퍅한 니느웨 사람들이 낯선 요나의 말을 듣고 단번에 회개를 하였다.
이럴 수가!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에 대한 찬양의 환성이 아니라, 요나가 바라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환멸의 탄식이었다.
요나는 몹시 화가 났다.
심판을 선포하라고 하더니 왜 저들이 회개를 하고 하나님은 심판을 철회하시는가!
요나는 자기 말대로 되지 않으므로 결국 자신이 우습게 되었으며
─사실 요나는 하나님이 그러실 줄 미리 알아봤다고 했다─,
그보다 더 이스라엘의 적대국이요 원수인 니느웨에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너무나 불합리했다.
그래서 성을 냈다.

그런데 그는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했다.
아주 모순되는 두 행동을 요나는 동시에 한 셈이다.
그것은 성난 기도였다.
하나님께 성이 잔뜩 났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따지며 하나님을 혼내는 질책이었다.
그것을 요나가 했다.
아, 그리고 그것을 우리도 한다.
기도는 거의 대부분 내 뜻의 관철을 위한 것이지 않은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이 기도의 대 원칙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 그것이 기도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상당히 요나가 성낸 기도를 하듯이 하나님께 내 뜻의 관철을 시행하라는 명령이 된다.
이 순간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님이 아니라 나를 시중드는 피조물이요 내 종이 된다!
하나님이 내게 정중히 ‘주인님 무엇을 해드릴까요’ 하고 아뢰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신다.
그것은 옳지 않다는 준엄한 판결이다.
그러나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정말 독이 단단히 올랐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또한 가능한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을 아끼셨다.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심판의 경고를 하시고 돌이키기를 바라셨다.
분명히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셨다!
이에 반해 요나는 자신만을 아낀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는 것만을 원하고,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해가되면 성을 내고 저주했다.

나는 나 이외의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게 이득이 되는 정도에 따라 아주 간사하게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지 않는가?
나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자가 되기를 ─마치 종처럼─ 바라지 않는가?
아, 결국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디도서 3:4)이 내게 없는 것이 문제다!
성을 낸다면 나는 나에게만 성을 내고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선대해야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