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1:1-13,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아, 다윗의 간음과 살인!
이 대목에 이르면 나는 참으로 괴롭다.
나는 여기 등장하는 여러 인물 가운데 가장 다윗과 같으며 다윗이 악을 행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일조한 몇몇 신하들과 같다.
나는 희생자인 밧세바와 가장 억울하고 의로운 우리아와 가장 다르다!

나는 다윗이 한 것과 똑같이 행했(을 것이)다!
나는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교묘하게 내 욕심대로 행하고는 들키기는 싫어서 별의별 궁리를 했(을 것이)다.

우리아는 헷사람이면서도 하나님(언약궤)과 나라(이스라엘)와 직속상관(요압)과 동료들에게 참으로 충성된 자다.
왕이 준 특별휴가도 전쟁 상황을 이유로 들어 반납한 자다.
그는 다윗 왕의 거짓 후의에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라고 고사한다.
그는 참 잘했다.
그가 만일 그날 밤 자기 집으로 가서 부인과 동침했다면 다윗의 범죄는 가려지고 더 큰 악을 막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결국 억울할 일을 당하면서 다윗의 범죄가 드러나게 하는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집으로 갔다면 이 일은 조용히 끝났을지 모른다.
잠언에서 솔로몬이 나중에 말하듯이 “심히 기이”한, 즉 흔적 없는 일에 해당되는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 그대로 다윗은 입 싹 닦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성군 행세를 했을 것이다.
이 파렴치한 일이 결국 드러나게 되는 것은 우리아가 이 밤에 그의 집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아는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라고 말했는데,
다윗은 ‘내가 어찌 남의 집에 가서 ··· 남의 처와 같이 자지 못하겠느냐’라고 말한 셈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가 왕의 권세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 상황인데도 왕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으며
“저녁때에” 어슬렁 “침상에서 일어나” 목욕하는 남의 집 여인을 신하를 통해 “알아보게 하”여 그를 불러오고 겁탈하였다.
이 모든 것이 왕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여전히 목동이었다면 전쟁에 동원되었든지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라도 누구를 시켜 여인을 부를 수도 그 이후에 이 짓을 무마시키려 수를 쓸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왕이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아, 악을!― 다 저지를 수 있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를 문책하셨다면
그 악행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계속 경고하시고 신호를 보내시고 그 마음을 찌르지 않으셨겠는가!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 무딘 양심으로 끝까지 고집스럽게 맞섰다.
이 어리석은 죄의 여정을 나는 잘 안다.
나는 옥상 위의 다윗이며
우리아에게 거짓 선심을 쓰면서 음흉한 죄를 더 짓는 다윗이다.
나는 하나님의 계속 되는 감화와 경고를 거부한 다윗이다.

죄 짓기 전에 “내가 어찌” 이 질문을 꼭 해야 한다.
다윗은 이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 때까지 갔다.
우리아는 이 질문으로 인해 결국 죽임을 당했지만 그는 순교자가 되었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었다.
나는 이 질문으로 나의 죄를 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