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3:1-11, 광야에서 한밤중과 새벽에도)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로 이 시의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사울에게든 압살롬에게든 다윗은 광야에서 쫓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곤경을 당하고 있다.
그때 그는 물을 갈망하고 안전한 요새를 앙모한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앙모한다고 고백한다.

아, 이것이 성도의 신앙이다.
“황폐한 땅”, 곧 “광야”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 그가 성도다.
아, 나는 하나님을 갈망하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갈망하는가?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갈망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시는 것,
바로 그 하나님이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 것, 이것의 갈망이다.
왜냐하면 광야, 곧 모든 것이 결핍된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고 하나님은 무능하시거나 부족하신 것 같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대체로 평안한 상황을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의 증거와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이 지금 나의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신다는 것이
나의 고통이 사라지고 형통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난은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함께 계시지 않음의 증거가 결코 아니다.
환난의 현장에,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도 하나님은 성도와 함께 계신다!
형통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이 하나님의 존재요 임재요 함께 하심이다.
그러므로 갈망과 앙모의 내용은 우리의 평안과 관련된 결과들보다 하나님 자체여야 한다.

그리고 다윗은 이러한 갈망을 어느 때 하고 있는가?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한다.
“침상”은 잠잘 때, 곧 밤이며, 또는 아플 때이다.
그리고 새벽에, 아직 사람들이 활동하기 이전의 어두운 시간이다.
한마디로 아직 쉬고 있을 때이다.
또는—우리의 기준으로는—하루의 시작과 끝이다.
그 시간은 하루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로 보인다.
중심시간대에 잘 하면 사람들에게 잘 하는 자로 충분히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주변 시간에도, 즉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철저히 자기만의 시간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한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금식과 기도의 관록을 자랑했다가 그것이 결코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는 책망을 받았다.
오히려 사람이 없는 시간, 오직 하나님과만 깊이 있게 교제할 수 있는 시간에 하나님께 집중한다.
“주를 기억하며” “주의 말씀을 ··· 읊조”린다.
이것은 곧 말씀 묵상이며 기도를 가리킨다.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밤마다, 아침마다 하나님과 교제한다.
이것이 곧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는 시간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송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은 몰라도 오직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시간이 진실로 성도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