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6:1-12, 그때가 좋았는데?)

이스라엘의 이동은 계속 된다.
이들은 광야에 터를 잡고 살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이 이들의 목적지이다.
광야는 거쳐 가야 할 곳이므로 정착하여 농사지을 땅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량의 조달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15일”
그동안은 애굽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식량을 해결했을 것이다.
이들은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과 패물과 의복을 얻었고, 분명 자신의 곡식창고의 재고를 다 챙겼을 것이다.
식량이 점점 바닥이 나자 걱정이 커지고 불만이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원망으로 변했다.

불평과 원망은 대개 과장의 과정을 거친다.
현재의 불만은 과거를 미화하고 미래의 불안을 극대화한다.
이 경우 이스라엘은 현재의 식량 걱정을 애굽에서 해방된 현실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것은 애굽에서 살 때가 더 좋았다는 과거 미화로 빠진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추억한다.
과연 그랬을까?
그 시절, 주인였던 애굽 사람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이?
혹 주인(애굽 사람)의 “고기 가마 곁에” 앉아서 고기를 굽거나 국을 푸던 사역을 했을지 모른다.
고픈 배를 그 고기로 채우지도 못하고 주인을 위해 사역만 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 어떤 특별한 절기에 “떡을 배불리 먹던 때”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예의 밥상이 풍성한 나라와 시대는 인류 역사에 없다.

현실에 대한 불만은 과거의 고통도 미화하여 현실을 더욱 부정하고 원망하게 하는 데 가속도가 붙는다.
결론은 뻔하다.
비참한 미래, 극한의 고통, 절망!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식량재고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불안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하신 특별한 민족이다.
이들은 “여호와의 군대”다.
그러면 이들을 군사로 소집하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음식을 공급하실 것이다.
이들은 노예해방을 기치로 정치적 투쟁을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소집하고 동원한 “여호와의 군대”에 자동적으로 입대한 것뿐이다.
그러면 더욱 이들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들을 먹이실 것이다.
하나님의 병참창고는 얼마나 넉넉할 것인가!
우주가 하나님의 것인데!

걱정이 된다면 기도해야 했다.
원망이 아니라 간구다.
과거를 미화하는 게 아니라 직시해야 했다.
그들은 두 달 전까지 노예였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것을 보면 안전하고 확실한 미래가 귀결된다.
미래를 직시해야 했다.

이들의 걱정과 염려를 하나님은 아셨다.
하나님은 이제 광야에서 이들이 이동 중에 농사도 짓지 못하면서 식량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셨다.
그래서 다 계획 해 놓으셨다.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농사를 면제받은 이스라엘!
하늘로부터 식량이 공급되는 백성!
인류 역사에서 유일한 사건이다.
아, 예수님께서 이것을 오병이어로 칠병이어로 재현하셨다!
이유는?
먹을 것 걱정하지 말라고(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현재를 불평하지 말고 미래를 염려하지 말라고,
또한 과거를 미화하지 말라고!

오늘날 우리 사회를 아주 지배하고 있는 사고인 불평과 원망과 분노에도 이것이 적용된다.
마치 과거에 아주 잘 살았던 것처럼 현재를 지나치게 폄하한다.
그러니 감사가 없다.
모든 것이 남의 탓, 사회 탓이다.
이스라엘이 모세와 하나님 탓을 한 것과 같다.

감사하고 소망하는 것,
이것이 출애굽 구원 공동체에게 마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