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4:1-12, 자기의 덕, 교회의 덕)

사도 바울이 13장에서 말한 사랑은 철저히 공동체적 관계에 관한 것이다.
세상에서 사랑은 단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나, 마음과 무관한 육체적 감각과 행위나, 관계를 무시한 일방적인 현상 등까지 포함하여 이해되지만
성경에서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짝사랑, 관념적 사랑, 강제적 사랑,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관계 속에서만 나타난다.
이 맥락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한다.
이 두 은사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 “덕”(유익)을 낳는다.
그러나 공동체적 관점에서는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
방언을 통해서는 자기 자신만 유익을 얻고 예언을 통해서는 교회가 유익을 얻는다.
둘 다 신령한 것이며, 덕을 세운다는 점에서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어떤 서열과 우열이 있겠는가!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관점에서는 방언보다 예언이 훨씬 유익하다.
특히 분쟁의 문제로 어려움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의 경우 공동체적 관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하여 바울은 교회에서는 예언을 힘쓸 것을 권한다.
그것은 방언의 열등함이나 무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은 자기 혼자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로(만) 하고 공동체에서는 공동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공동체적 언어로서 예언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방언의 은사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방언이 얼마나 신령하며 감사한 은사인지 안다.
하나님께서 내게도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좋겠다.
그것은 얼마나 깊이 하나님과 영으로 나누는 교제인가!
나의 육신적 한계를 훨씬 넘어서 하나님과 그렇게 깊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교제할 수 있도록 주신 은사는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공동체적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개인의 유익을 위해 주신 은사이므로 그 한계 안에서만 누려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는 공동체적 언어와 소통을 통해서만 공감이 되며 그래야 유익이 된다.
바울은 이미 “울리는 꽹과리”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사랑 없는, 즉 관계없는 소음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은사인 방언이 그렇게 쓸모없어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골방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때 발휘되어야 할 은사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회중을 상대로 한 은사만이 유익을 낳는다.

그러고 보면 교회 안에서 방언이냐 예언이냐의 문제는 곧 사랑의 추구냐 아니냐의 문제다.
공동체를 사랑한다면 공동체적 소통과 이해와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13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이 없으면”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은 행위는 아무리 신령한 것이어도 공동체 안에서는 사랑이 아니며 무익하다.

그렇다면 예언도 얼마든지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하지 않고 행해질 여지가 있다.
자기 자랑을 위해 하는 경우가 그렇다.
설령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순간에도 그가 영적 교만함 속에서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공동체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 순간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지만 정작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무관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알아들을 언어로 예언을 행한다는 사실만으로 만능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겸손하며 존중하는 공동체적 마음이 없다면 그의 예언은 그에게 자기의 덕을 ─이 경우, 자기 자랑을─ 세우는 데 불과하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교회는 사랑하는 곳이다.
교회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곳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