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1-13, 불쌍히 여기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요 사람은 본질상 죄인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인간의 몸으로 오셨어도(성육신) 본질은 차이가 너무 난다.
그것은 능력의 차이만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신다.
그것은 자연(피조세계)에는 없는 신성의 발현이다.
예수님은 굶주린 무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풍족하게 먹이실 수 있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40년이나 하늘에서 내리시는 만나로 먹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똑같이
예수님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다.
그런 능력은 제자들에게 없다.

그런 능력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능력을 행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런 능력이 없다고 꾸짖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신적인 기적을 행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차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오병이어 때도 그랬다.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
그때도 제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제자들은 “빈들”과 “날도 저물어”가는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하고 반문했다.
무리를 먹이는 것은 어림 턱도 없다고 예수님을 핀잔하는 소리다.
이번에도 같은 말투다.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역시 “광야”를 강조하여 음식 공급의 불가능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역시 예수님을 핀잔하는 말투다.
단순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불가피한 무능력을 겸손하게 아뢰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능력 없음이 문제가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다.
제자들은 이 무리가 빨리 해산되기만을 바랄 것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예수님은 매번 무리를 긍휼히 여기시는데 제자들은 한 번의 학습이 있었는데도 더 배우지 못했다.
학습과 훈련에 진보가 없다.
오병이어의 엄청난 경험(학습)이 바로 얼마 전에 있었고,
지금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 교훈을 전혀 적용할 생각을 못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리에 대한 생각보다 자신들에 대한 생각이 우선이다.

이 사건에서 나는 또 나를 본다.
나는 열두 제자와 똑같이 신속하게 계산을 하였을 것이다.
지금 모인 수가 몇 명인가, 이들에게 떡이 몇 개씩 필요하며 전체 합하면 얼마의 돈이 필요할까?
나는 무리가 스스로 알아서 빨리 귀가하기를 바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그만 돌려보내기를 원할 것이다.
이제 우리도 쉬어야 한다.
나는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오병이어의 기적을 잘 생각해내지 못할 것이다.
나의 머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데 거의 백치에 가깝다.
나의 필요, 욕망, 손해 본 것, 원망할 것은 비상하게 오래 기억을 하고 부풀릴 것이지만,
내가 입은 은혜, 선을 위해 적용해야 할 학습에 대해서는 낙제점이다.

오병이어와 똑같은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신속하게 내가 가진 것을 찾아내어 그 작은 것을 예수님께 드려 지난번과 똑같이 이번에도 이 작은 것으로 이 큰 무리를 먹여주십시오,
하고 기쁘게 부탁을 드리는 일일 것이다.
나는 그랬어야 한다.
지난번에 그렇게 하셨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해주세요, 하고 요청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나 이번에나 내게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불가능이요 불편함이요 무관심이다.

나의 계속 되는 기도제목과 과제는 불쌍히 여김(인자, 자비, 긍휼)이다.
아, 나의 속이 넓어지기를!
주님이 내 마음을 넓히시는 역사에 순종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