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13-4:11,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그 “길을 준비”하는 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바로) 사역하실 수 있도록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길”로 오셨다.
예수님께서 요한이 세례를 주는 곳으로 오셨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은 요한이 닦아놓은 길 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세례주시는 일을 시작하실 것인가?
요한이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면
그 옆에서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것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예상과 전혀 다르게
그가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요한이 닦아놓는 길 위에 왕의 위엄으로 행차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 위로 누군가 걸어가도록 스스로 길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요한이 길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수님이 요한의 길을 준비하시는 것처럼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예수님을 높였지만,
예수님은 마치 세례를 받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임박한 진노를 피”해야 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자신을 낮추신 것이다.
구세주로 오신 분이 회개할 것이 있는 죄인처럼 세례를 받았다.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낮아지신 예수님의 순종을 기뻐하셨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증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의 권세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오셨다.
죄인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심으로 심판받기 위해 오셨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 지금 물로 세례를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다.
대단한 아들, 대단한 아버지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마귀가 유혹하는 기준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것을
단호히 물리치셨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한 것처럼
반쪽의 – 그리하여 잘못된 – 진리로 예수님을 미혹하였다.
마귀는 그가 마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듯이 높였지만,
그것은 단지 그의 방식을 만족시켜 결국의 마귀의 수하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케 하려는 궤계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유혹을 하나님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치셨다.
그 어떤 세상의 효과적인, 합리적인, 그럴듯한 방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나님이 이미 하신,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다시 한 번 확증된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의 자리에서는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셨지만,
예수님을 세상적 기준으로 드러나게 하여 결국은 자기의 수하에 두려는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단호히 대적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 해당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또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명령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제자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이신 것과 같이
성도들도 겸손하게 순종하고 말씀으로 담대함으로써
역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실 때 이루어진다.
아, 하나님께서 나로 인해 과연 얼마나 기뻐하실까?
나는 하나님을 늘 안타깝게 하는 자가 아닌가?

예수님의 순종을 기뻐하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말씀의 권위로 마귀를 담대히 물리치신 것을 기뻐하신 하나님,
저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참으로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이 너무 높습니다.
그러면서 반대로 마귀의 유혹에는 너무도 나약합니다.
마귀가 저의 죄성을 부추길 때 저는 너무도 겸손하고 순종적입니다.
제가 하나님 말씀으로 겸손하며, 또한 담대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