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4:14-33, 개혁: 말씀 공동체로의 복귀)

요시야는 재위 8년에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제12년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였다.
그는 “아직도 어렸을 때에”, 즉 그의 나이 16세부터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의 진면목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 이후에 나타난다.
이 해에 그는 “땅과 성전을 정결하게 하기를 마치고”
성전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성전의 더러움이 제거되었고,
이제 성전이 원래 모습대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왕에게 전달되어 읽혀졌으며
백성들까지 듣고 민족적인 언약체결로 이어졌다.

이 사건에서 개혁의 두 가지 본질이 나타난다.
하나는 개혁이 곧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적 차원의 개혁이 진정한 개혁이라는 것이다.

이 개혁의 핵심은 율법책의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어느 오래된 희귀 판본이 발견된 골동품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들 가지고 있는 최신판 율법책과 인쇄 시기와 방법이 다른 책이 한 권 발견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수가 중단되었던 율법책의 발견을 말한다.
더 이상 필사되지 않고 더 이상 읽히지 않는,
더 이상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율법책이 발견된 것이다!
마치 히스기야 때에 유월절이 부활된 것과 같이
유다 백성은 율법책을 잊고 살아왔다.

이것은 이 율법책을 들은 요시야 왕의 반응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율법의 말씀을 듣고 곧 자기 옷을 찢”었다.
아무리 고서로서의 가치가 큰 희귀본이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 옷을 찢”을 일은 없다.
그러한 행위는 성경에서 회개와 애통의 표현이다.
요시야는 율법“책”에 놀란 것이 아니라
율법의 “말씀”에 반응한 것이다.
그는 한 골동품을 ‘본’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었다’.
그는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었다.

책이 사라졌고 그리하여 그 내용도 잊혔다.
그리고 이제 책이 발견되어 그것이 읽히고 들렸다.
오늘날은 이와 같은 일이 없을 것이다.
– 물론 지금도 특정 지역에서는 성경책을 가질 수 없다. –
오늘날의 더 큰 문제는 책의 부재가 아니라 말씀 듣기의 거부다.
버젓이 성경책은 서가에 꽂혀있고, 심지어 여러 권이 즐비하여도 읽지 않는다.
이제는 일요일에 한 번 교회 갈 때에 가지고 갈 일도 없게 되었다.
교회에 성경이 구비되어 있고
그 세련된 화면투사로 성경말씀이 신속히 제공되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지 않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 충분해졌다.
말씀은 빈곤해지고 설교만 홍수를 이룬다.
말씀은 내가 듣는 게 아니라 전문가만 듣는다.
과연 그 전문가는 말씀을 듣는가?
그는 그가 들었다는 말씀을 우스개와 엄포로 적당히 버무려 이게 말씀이라고 주입한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사람의 말을 듣고도 말씀을 들었다고 자위하며
또 일주일을 살아간다.

오늘날 요시야의 개혁은 “율법책의 발견”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개혁이며,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는 개혁이다.

이 개혁은 또한 공동체적 움직임이었다.
앞서 제8년과 제12년의 기록에 비해 제18년의 개혁에서야
비로소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제사장 힐기야, 서기관 사반, 여선지자 훌다, 아히감, 압돈, 아사야, 장로들, 주민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모든 백성이 나온다.
이로 보건대 아마도 제8년과 제12년의 개혁은 요시야의 개혁이었다면,
제18년의 개혁은 유다 민족·국가의 개혁이다.
거기에 수많은 개혁의 동역자들이 함께 했다.

개혁의 핵심이 “말씀”을 “듣”는 것에 있었다면,
그것은 요시야 왕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 한” 자리에서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 주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언약을 체결하고 죄악을 척결하며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다.
그 개혁은 공동체적 순종이고 행동이었다.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똑같은 공동체적 순종과 실천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