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2:1-19,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히스기야의 개혁,
즉 성전의 정화와 유월절의 준행과 그 이후 일상의 쇄신을
성경은 “충성된 일”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충성을 하려는 자는 일상에까지 이르는 영적 쇄신을 해야 한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가 쳐들어 왔다.
앗수르는 이미 북이스라엘을 정복하였다.
기고만장할 때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도 이런 일은 일어난다.
하나님께 신실하고 영적 개혁을 단행하고 첫사랑을 회복한 뒤에도
고난은 따른다.

아니 그러했기 때문에 세상이 공격한다.
어쩌면 고난이 없다면, 세상의 공격이 없다면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 충성된 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세상과 동류가 되는 것이요,
그러면 굳이 세상이 성도를 공격할 일이 없다.
성도가 바른 길을 갈 때 공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이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위기를 이길 수 있었다.
히스기야는 이 위기에 영적으로 대처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그는 또한 공동체적으로 위기에 맞섰다.
그는 혼자 두려움에 빠지거나 혼자만의 용기로 영웅행세를 하지 않았다.

히스기야는 “방백들과 용사들과 더불어 의논하”였다.
그는 “무리를 모으고 말로 위로”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상기시켰다.
그는 전쟁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이 전쟁은 우리(유다)와 앗수르 왕의 대결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와 “그와 함께 하는 자”의 전쟁이다.
그것은 하나님 대 앗수르 군대의 대결이며,
하나님 대 앗수르가 믿는 신의 대결이다.
성경에서 누누이 강조하듯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고,
유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우신다.
히스기야는 이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영적 통찰과 담대함과 동역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유다 백성들이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이기 때문이었다.
방금 유다에서 개혁이 일어났었다.
그것은 일회용, 일시적인 행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영적 쇄신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각각 자기들의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개혁의 종료가 아니었다.
개혁은 예루살렘을 떠나자마자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이 어제의 말씀이었다.
그들의 개혁은 일상에서, 고향에서, 생업의 현장과 가정에서 속개되었다.
그것은 제도화되고 직임으로 체계화되고
그를 위해 사람이 세워지고 훈련되고 그리하여 개혁이 일상이 되었다.

이러했기에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은
기고만장한 앗수르의 침범에 영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대항할 수 있었다.

나는 계속 개혁 중이어야 한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이 주 동안 사경회를 마친 뒤에
이제 나의 일상에서 그 개혁을 계속해야 한다.
나의 충성은 예루살렘에서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본성 기업”에서 계속되는 충성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일상과 생업과 가정에서,
나의 깊은 내면 속에서 영적 쇄신이 지속되는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나는 어떠한 위기와 위협과 고난에 대해서도
영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대처할 것이다.

히스기야가 2700여년 전에 한 이 충성은
오늘 나를 위한 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