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1-6,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성탄절 다음 날의 묵상으로 시편 23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이 날에
이 말씀은 이에 맞게 적용될 수 있다.
즉 목자이신 여호와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이시다.

베들레헴의 보잘 것 없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 구약에서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약속하신 구세주이시다.
예수님은 죄인을 대속하는 어린양으로 오신다.

예수님께서 내가 치를 수 없는 나의 죄 값을 다 치르심으로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셨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 최대의 부족함은 죄 값을 치를 능력의 부족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소유의 부족함은 모두 상대적이고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의 부족함은 자족함이나 사회적 분배와 조정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비극의 궁극적 원인이요 인간 존재의 핵심과 실상인 죄(성)는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다.
죄를 다루는 능력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부족하다.
결함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하시는 어린양으로 오심으로
우리를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목자가 되셨다.
예수님은 나(우리)의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나를 먹이시며 쉬게 하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곧 “풀밭”이요 “물 가”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생명과 관련된다.
부차적인 여가가 아니라 생존을 예수님께서 보장해주신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신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의 “영혼”이 “소생”하는 것이다.
영혼이 죽어 있는 채로 몸만 배부르고 쉬고 있다면 무슨 소용인가!
영혼이 죽었는가 살았는가가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예수님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기 위해 오셨고, 정말로 그렇게 하셨다.
나의 영혼은 소생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들이 물질적 지성적, 심지어는 인격적 능력과 조건에서 매우 뛰어나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의 영혼은 소생하지 않은 자요, 그는 영으로는 죽은 자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도 모를 정도로 비극적인 존재다.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보다 더 놀랍고 감사한 일이 어디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만나 영혼이 소생하므로 이제 산 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내 몸이 어느 환경에 처해도 나의 영혼은 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영혼이 살고 죽고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예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는데 그 무엇이 다시 죽일 수 있겠는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35)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두렵지 않다.
비정규직인 것, 수입이 적은 것, 집이 허름한 것,
반찬이 호화롭지 못한 것, 시외버스를 타고 걸어 다니는 것,
이런 것은 나의 영혼(중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런 것은 나를 해롭게 하지 않는다.
나를 해치는 것은 내 속의 죄성뿐이다.
이것을 다스리시는 분만 내게는 위대하다.

예수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
내게 없는 것이 있다면 부족함과 불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