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24-41,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을 보고 “죄”와 관련을 지은 것은 먼저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
바리새인들이 다시 한 번 그를 죄인으로 몰고 간다.
이들이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자
눈을 뜬 맹인이 “이상하다” 하면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해준 사건보다 더 분명한 하나님의 일이 어디 있느냐,
즉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다”고 대답했을 때,
바리새인들은 죄인인 주제에 종교지도자인 자기들을 가르치려하는 것에
벌컥 화를 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 나서 우리를 가르치려느냐”

이들은 맹인의 장애가 분명 “죄 가운데서” 난 증거로 보았다.
그것은 제자들이 물었던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와 같은 인식이다.
그런데 이들의 말대로 한다면 눈을 뜬 맹인은 죄인이 아니다.
이들은 그가 죄인이므로(“죄 가운데서 나서”) 맹인으로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이 (그리고 제자들도) 말하는 대로
시각장애가 그의 죄의 결과라면,
이제 눈을 뜬 것은 그의 죄가 무효화되었다는 반증이 된다.
바리새인의 논리에 따른다면
그는 더 이상 맹인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그가 죄인임을 입증할 증거는 이제 더 이상 없다.
그 증거가 사라졌다. 무효화되었다.
이 눈 뜬 맹인은 맹인이었던 증거가 소멸됨으로써
죄인으로서의 증거도 유효기간이 끝난 셈이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그를 더 이상 죄인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들이 문제 삼았던
‘죄인인 주제에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하느냐’는 반박은 효력을 잃는다.
그들은 이 사람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므로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먼저 “죄인”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당장으로서는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증거를 그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어찌 죄냐’라는 말을 그들은 이미 들었고,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었던 맹인이 죄에서 벗어난 명확한 증거를 보고 있으며,
예수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해준, 즉 그의 죄를 무효화시킨 증언을 계속 듣고 있으니
그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죄인으로 몰고 갈 수 없다.
그들의 논리대로 할 때 눈 뜬 맹인도,
눈을 뜨게 해 준 예수님도 죄인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누가 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판결)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만이 하신다.
하나님만이 세상의 죄에 대한 재판관이시다.
사람들은 죄의 증거를 보고서야 죄인인지 아닌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죄인인 증거가 없다면, 죄인이라고 함부로 비판을 가할 수 없다.

본문은 오히려 누가 진짜 죄인인지를 알려주며 맺는다.
보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하고 보는 것을 죄 없다고 한다면,
맹인이었던 자가 보게 되었으니 그는 이제 죄인이 아니며,
그것을 애써 부인하려는 자들은 이 맹인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므로
이들이 죄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논리에 따라
죄가 사라진 이전 맹인에게서 여전히 죄를 보고 있으니
그들은 없는 것을 보는 것이요, 결국 잘못 보는 것이니
그들이 맹인이며, 결국 그들이 죄인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여기 이 맹인의 죄는 벌써 사라졌지만
너희들의 죄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뜻이다.
이들이 맹인의 사라진 죄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면
이들은 제대로 보는 자요, “죄가 없”는 자이지만,
이미 사라진 죄를 여전히 “본다고 하니”
이들은 지금 이 순간 맹인이요 죄인이다.

그들은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
그들이 이미 예수님과 맹인을 죄인이라고 예단한
자신들의 잣대에 의해 눈이 멀어있다.
우리가 보통 편견과 선입견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의해 눈앞에 벌어지는 실제를 전혀 보고 있지 못하다.
그들이 보는 것은 그들 눈앞의 기준일 뿐이다.
그 기준으로 그들의 눈은 멀어(가려져) 있다.

아, 예수님이 “자유케” 하시는 “아들”(“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로 오셨는데
눈앞에 이 예수님을 둔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자기 눈꺼풀(죄)의 종이 되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맹인이요 죄의 종으로 있다.
아, 예수님 앞에서 이들은 맹인이요 죄의 종이다.

정말 이런 일이 부분적으로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성도는 허상에 가려 실제를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다.
그 반대로, 실제를 보기 때문에 그 많은 허상들을 무시하고(=보지 않고)
사는 자다.
성도는 예수님이 주신 빛과 눈 뜬 기적으로
더 이상 “죄가 그대로 있”는 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