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42-59,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해 제일 먼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적과 그로 인한 유익(예를 들어 치유, 배부름 등)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그 다음에는, 처음 들어보는 권위 있는 교훈 때문이다.
기존의 지도자들에게 들어보지 못한 시원한, 희한한, 지혜로운 말씀을
예수님에게서 듣고 몰려왔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혹은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로 불렀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의 말씀의 깊이에 이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떠났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이심을 주장하고,
종국적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대속을 말씀하시면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등을 졌다.
그것은 그들이 기대하였던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었다.

본문의 상황도 처음에 예수님을 믿었던 자들이 진리의 근저에 이르자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돌변하는 일이 벌어지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출처에 대해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셨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아니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시다.
출처의 차이가 우선 중요하고,
또한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하다.
절대로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신적 권능의 일을 하고
약속된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많이 보여주어도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을 모른다.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죄의 종인 것을, 그리하여 자유롭게 되어야 하는 존재임을 모른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구약의 조상들이 모두 예수님을 기다려 온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을 아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행동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성경이다.
성경(구약)에 비추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약속)하신 바와 어긋나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신기한 능력이 관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일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예수님에 대해 미리 말씀하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리 다 보여주신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의 기대와 상상에 근거를 두었고,
성경이 아니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더 기초하였다.

예수님이 계속 강조하시는 것은
그들이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시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하나님을 모르니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사실도 모른다.
그들은 성경을 모르니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모르며,
메시야는 죄인들을 대속하심으로 자신이 고난을 당하시고 죄인들을 살려주신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을 아는가, 성경을 아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모든 것을 그것이 결정한다.
성도들마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기 열심이나 종교적 헌신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말씀의 묵상과 연구와 배움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근거를 수정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자신을 견고한 근거 위에 세우는 기쁨의 순간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명철(지혜)이요 진리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17:3)